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먼 래틀 (문단 편집) === 베를린 필하모닉 (2002~2018) === 1999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차기 선출되어 2002년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래틀이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뒤를 이은 베를린 필의 지휘자 후보로 오른 것에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었지만, 마땅한 경쟁자가 없는 관계로 최종투표에서 별 어려움 없이 당선되었다. 이때 유력하게 언급되었었던 경쟁자인 [[마리스 얀손스]]는 당시에 심장마비 수술을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건강 문제로 후보군에서 배제되었다. 1989년 당시 마젤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다니엘 바렌보임]]은 역시 많은 나이가 걸림돌이 되었고,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상임지휘자와 음악감독을 겸임하고 있기 때문에 베를린 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혔다. [[파이낸셜 타임즈]] 등에 의하면 사이먼 래틀은 43%의 지지율을 얻었다고 한다. 래틀이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 결정적인 요소는 나이와 비즈니스 감각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지명도가 있는 베를린 필이어도 그 유지비가 엄청난 만큼 굉장히 하드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그만큼 많이 공연하고 앨범을 내면서 오케스트라를 유지한다. 때문에 정기음악회 뿐만아니라 순회공연, 음반녹음 등 수많은 일정을 함께 소화하며 악단을 발전시킬 젊은 지휘자를 원했다. 그래서 1989년 카라얀 사후 강력한 후보 중 한명이었던 [[로린 마젤]]이 당시 상임지휘자 자리가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 넘어가자 예약된 공연은 물론 12장에 달하는 음반 녹음 스케줄을 모두 취소했는데 이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대미지를 입은 베를린 필 단원들은 격분했다. 이후 마젤과 베를린 필의 관계는 매우 소원해졌고, 1999년에는 고령을 이유로 차기 지휘자로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그정도로 베를린 필은 젊고 계약 잘 따오는 비즈니스 감각이 있는 지휘자를 원했고 그게 래틀이었던 것이다. 래틀 본인이 직접 베를린 필의 재단법인화 계획서를 작성해서 베를린 필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당선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래틀이 젊은 나이인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30대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40대에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50대에 베를린 필에 취임한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나이가 많은 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카라얀 사후 바렌보임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후보로 꼽힌 것은 40대라는 나이가 크게 작용했다. 로린 마젤, [[리카르도 무티]], [[오자와 세이지]] 등 다른 후보들도 당시에 40~50대였으며, 60대 이상이었던 지휘자들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전임 지휘자이자 레전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그를 차기 지휘자로 점찍었다는 썰은 있으나 공식적인 언급은 없다. 공식적으로 1989년 4월에 베를린 필을 사임한 이후에도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후임자 선출에 전혀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1986년 래틀이 베를린 필 객원 지휘로 [[말러]] 교향곡 6번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다음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 래틀을 점찍었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카라얀이 공식적으로 래틀을 후계자로 언급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카라얀은 래틀 말고도 여러 젊은 지휘자들을 자신의 후계자감으로 언급했었다. 대표적으로 [[세이지 오자와]]와 [[세묜 비쉬코프]]가 있다. 누구보다도 카라얀이 자신의 후계자로 자주 언급한 이는 오자와 세이지였다. 70년대말과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오자와는 베를린 필을 맡기에는 경륜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카라얀이 많이 밀어주기도 했고 오자와 본인의 기량도 출중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 세이지 오자와는 베를린 필과 함께 해외순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베를린 필과 호흡이 잘 맞았고 진지하게 베를린 필의 차기 지휘자 후보로 널리 언급되었다. 1985년 처음 베를린 필을 객원 지휘한 세묜 비쉬코프는 카라얀의 격찬을 받고 베를린 필의 후계자로 급부상한 바 있다. 카라얀은 비쉬코프와 베를린 필과 음반 녹음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1975년 카라얀과 DG가 파격적인 재계약을 맺은 이후 카라얀 이외의 지휘자가 베를린 필과 음반 녹음을 남긴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세묜 비쉬코프]] 이외에는 84년 당시 자비네 마이어 사건으로 카라얀이 음반 녹음을 취소하자 베를린 필 단원들의 요청으로 [[리카르도 무티]]가 녹음 세션을 가진 바 있었다. 하지만 무티 역시 이내 카라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추가 녹음을 고사했다. 그 밖에 [[다니엘 바렌보임]] 역시 당시 베를린 필 단원들의 요청으로 비공식 녹음을 남겼지만 역시 카라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음반사들이 녹음 발매를 고사하여 수년 후에야 발매되었다. 그리고 비쉬코프 이후 80년대 말에야 세이지 오자와, 로린 마젤 등이 베를린 필과 음반 녹음을 가질 수 있었다. 래틀에 대해서는 카라얀이 직접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래틀을 초청한 적이 있고, 여기서 래틀이 [[피가로의 결혼]]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예를 들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지휘하는 무수한 모든 지휘자는 음악감독인 카라얀의 초청으로 지휘한다. 카라얀은 특히 자신과는 아직 경쟁이 되지 않은 많은 젊은 지휘자들을 과감하게 중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덕분에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 등이 아직 이름이 알려 지지 않은 시인 시절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지휘자에 대한 립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정작 카라얀 자신은 어느 누구도 후계자로 키우려는 실질적인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후계자가 일찍 결정되어 자신의 권력에 레임덕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끊임 없는 구설수에 대해 젊은 뉴비 지휘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 편 독설의 대가~~그리고 츤데레~~ [[세르주 첼리비다케]] 역시 뮌헨필에서 래틀이 객원지휘를 하는 것을 보고 극찬했고 이에 첼리비다케 사후 뮌헨필에서 사운드를 살릴 만한 유일한 지휘자로 래틀이 지목되었으나, 래틀은 이를 고사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첼리비다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푸르트벵글러를 제외한 사실상 모든 지휘자들에게 독설을 날린 첼리비다케가 래틀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음악을 좀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래틀은 첼리비다케가 극히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래틀은 임기 중에 한 차례 계약을 연장하여 2018년 상반기까지 베를린 필에 재임했다. 래틀은 재임 기간 동안 단원들이나 젊은 관객들에게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래틀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디지털 콘서트홀[* 인터넷을 통해서 베를린 필의 공연을 생중계해주는 베를린 필하모닉 공식 웹사이트. 때로는 해외 공연도 생중계를 해주며 아카이브를 통해서 예전에 했던 공연 영상들도 볼 수 있다.]이 말 그대로 대박을 거두면서 베를린 필의 재정 상태를 크게 개선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를린 필의 재단법인화도 한 몫을 했다. 또한 베를린 필하모닉 고유의 레코딩 레이블 [[https://www.berliner-philharmoniker-recordings.com/|Berliner Philharmoniker Recordings]]를 런치한 것도 래틀 시절의 일. 여러모로 ~~금전적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발전시킨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카라얀 시절에 비하면 궁핍하지만~~ 다만 아쉬운 독일 정통 레퍼토리 해석을 이유로 보수적인 단원들과 관객들은 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아바도 뒤를 이을 차기 상임지휘자를 선출할 때도 래틀을 지지하는 진보적인 성향의 젊은 단원과 바렌보임을 지지하는, 즉 독일 정통 레퍼토리(특히 "Three B"라 통칭되는 베토벤(Beethoven), 브람스(Brahms), 브루크너(Bruckner))를 선호하는 보수적인 단원 이렇게 둘로 나뉘어져서 의견 차이를 좁히는데 힘들었다고 한다.] 선출 때부터 단원 내부적으로 의견이 엇갈려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만큼, 그러한 비판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오케스트라 내에서 압도적인 권한을 행사하지는 못했으며,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베를린 필 단원들이 종종 지휘자의 지시에 반발해 당혹스러웠던 경험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베를린 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악단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지휘자기도 했지만, 오케스트라의 글로벌화를 위해 독일적인 색채를 희석시켰다는 비판 역시 공존하는 지휘자다. 베를린 시기의 여담으로 장기 재임을 했음에도 [[독일어]] 구사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는데 오케스트라와 소통할 때 약점이 된다고 본인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비판적인 언론에서 독일 레퍼토리 해석과 세트로 묶어서 까는데 자주 써먹는 소재였기 때문에 독일어 지적에 대해서 아주 질색을 한다.[* 전임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20대 초반에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유학해 이탈리아 출신임에도 독일어가 유창했고, [[키릴 페트렌코]]는 18세에 러시아에서 [[오스트리아]]로 이주했기 때문에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같은 외국인임에도 독일어 구사에 현격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두 사람에 비해서 비교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